알고리즘 이긴 연필의 반격
알고리즘 이긴 연필의 반격
아날로그 기록에 빠진 Z세대와 서사 마케팅의 부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지식의 대중화를 이끌었을 때, 유럽의 귀족들은 여전히 필사본을 고집했다. 대량 생산된 정보에는 영혼이 깃들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인공지능(AI)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2025년의 풍경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클릭 한 번이면 모든 것이 요약되고 생성되는 디지털의 파도 속에서, 역설적으로 손으로 직접 쓰는 아날로그 기록 시장이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부상했다. 효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행위가 가장 힙한 문화가 된 셈이다.
Z세대를 관통하는 텍스트힙 트렌드는 이제 읽기를 넘어 쓰기로 확장 중이다. 기록하는 삶 자체가 하나의 정체성이자 차별화된 패션이 됐다. 지난 4월 온라인 편집숍 29CM가 개최한 문구 페어 인벤타리오에 유료 입장객 2만 5000명이 몰린 사실은 이를 방증한다. 교보문고가 내년 주요 키워드로 독후굿즈를 꼽은 배경도 같다.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자동 분석 리캡(Recap)보다, 투박하더라도 자신의 손때가 묻은 수제 연말 결산을 공유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오리지널리티로 대접받는다.
기업들의 마케팅 문법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과거 패션 브랜드와의 협업이 대세였다면 이제는 기록 브랜드와 손을 잡는다. 식품 기업 오뚜기는 식단 일기를 쓰게 하는 모닝 키트를 선보였고, 커피 전문점 폴 바셋은 다이어리에 미니 색연필을 곁들였다. AI가 만든 콘텐츠가 무한 복제되고 휘발되는 시대에 소비자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나만의 흔적을 갈망한다. 기록은 단순한 저장을 넘어, 가속화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아를 붙잡아두려는 필사적인 노력이기도 하다.
결국 기록 마케팅의 본질은 도구가 아니라 경험의 복원이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인간은 자신의 온기가 닿은 고유한 무언가를 증명하고 싶어 한다. 이제 브랜드는 기능적 편익을 강조하기보다 소비자가 자신의 서사를 직접 써 내려갈 수 있는 여백을 제공해야 한다. 디지털 디톡스를 넘어선 기록의 열풍은 한때의 유행이 아니라,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적 가치의 재발견이다. 혁신은 때로 가장 오래된 도구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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