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과잉 시대, 진실의 역설
정보 과잉 시대, 진실의 역설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외계 지능'의 서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인류 역사에서 이야기(story)는 늘 중요한 동력이었다. 수십만 년 전 매머드 사냥에서부터 21세기 원자폭탄 제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협력해야 하는 모든 거대 프로젝트의 근저에는 물리학적 사실(E=mc²)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을 움직이는 '이야기'가 있었다. 고대 종교 신화, 근현대의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세속 이데올로기, 심지어 돈과 기업이라는 허구적 개념까지 모두 인간이 창조하고 믿어 온 이야기의 산물이다. 우리는 이처럼 수천 년 동안 오직 인간의 상상력으로 구축된 문화적 세계 속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이야기를 창조하는 시대가 열렸다. 바로 인공지능(AI)이다. AI는 이제 경제 이론, 새로운 통화 시스템, 예술, 시,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인간의 문화적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인공 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라 불려 왔지만, <사피엔스>로 유명한 유발 하라리가 2024년 최신작 <넥서스>에서 주장하듯 이제는 우리가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외계 지능(Alien Intelligence)'이라 칭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2016년 바둑에서 이세돌 9단을 꺾은 알파고(AlphaGo)가 수천 년간 인간이 탐구했던 바둑 전략의 '작은 섬'을 벗어나 '새로운 대륙'을 발견했듯이, AI는 금융, 예술, 정치, 종교 등 점점 더 많은 분야에서 인간의 지혜를 단숨에 뛰어넘는 새로운 서사를 창조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정보기술의 발달이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왔던 역사적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5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진흙과 나뭇가지로 시작된 '쓰기'의 발명은 소유권 개념을 공동체의 합의에서 '문서'로 옮겨 개인의 권한을 강화하는 동시에, 대규모 왕국과 제국의 기반이 되는 중앙집중식 세금 징수 시스템을 가능하게 했다. 20세기 라디오와 텔레비전 같은 대중 매체의 등장은 대규모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를 동시에 가능케 했다. 그러나 이제 AI 기반의 '무기적 정보 네트워크(Inorganic Information Network)'는 그 이전의 어떤 유기적 네트워크와도 다르다. 연중무휴, 24시간 감시가 가능해지면서 휴식과 사생활이 존재하지 않는, 사실상 무한한 감시와 기록이 가능한 세계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문제는 정보의 폭증이 곧 진실의 증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정보는 진실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진실은 증거와 연구에 많은 비용과 노력을 투자해야 얻을 수 있는 희귀한 정보 유형이다. 반면, 허구의 정보는 리서치 없이 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 AI가 대량의 정보, 특히 허위 정보와 환상을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이 시대에, 우리는 진실을 건져 올리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AI 시대를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완고한 사전 규제가 아니라, 스스로 오류를 발견하고 수정할 수 있는 살아있는 ‘제도(Institutions)’와 '정보 네트워크'이다. 민주주의가 선거라는 자체 교정 메커니즘을 통해 실수를 인정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듯이, 과학이 끊임없이 이전의 이론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듯이, AI 기술 발전과 그 산물이 야기하는 위험에 대응할 수 있는 강력한 자체 수정 메커니즘을 가진 제도적 장치를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자칫 AI라는 외계 지능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이야기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힘을 가진 소수(권력·플랫폼·자본)가 구조적 위험과 비용을 대다수 시민과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정보 독재'의 시대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보가 아닌 진실을 얻기 위한 사회적 노력과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AI가 빚어낸 거대한 망상 속에서 스스로 파괴적인 결정을 내리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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