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끝에서 길을 잃은 영혼
혀끝에서 길을 잃은 영혼
식민의 유산과 효율의 그늘에서 사라지는 모국어의 사유
열여덟 달 된 딸과 서른일곱 살의 엄마가 그림책 앞에 나란히 앉아 이쿤이라는 단어를 발음한다. 요루바어로 배라는 뜻이다. 딸은 자기 배를 쿡 찌르며 단어를 익히고 엄마는 그 소리의 울림을 뒤늦게 혀끝에 새긴다. 나이지리아 출신의 작가 오인칸 브레이스웨이트의 이 고백은 서글프면서도 날카롭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요루바인이지만 정작 복잡한 생각을 담아낼 도구는 식민 지배자의 언어인 영어뿐이라는 사실은 현대인이 마주한 정체성의 균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해는 하지만 말할 수 없는 언어는 의식의 심해에 가라앉은 난파선과 같다. <파이낸셜타임스>(FT) 최근 칼럼(Learning Yoruba with my daughter, 12월 20일자) 중 일부 내용이다.
역사적으로 나이지리아는 영국의 바느질로 급조된 누더기 국가였다. 수많은 부족과 문화를 하나로 묶기 위해 동원된 실은 영어라는 공용어였다. 제국의 언어는 효율이라는 명분 아래 현지의 언어를 사적인 영역으로 밀어냈고 지식과 권력의 자장 안에서 모국어는 서서히 힘을 잃었다. 도레미 음계처럼 성조에 따라 약과 전쟁과 숫자가 결정되는 요루바어의 입체적인 음악성은 알파벳의 평면적인 질서 속에 갇혔다. 영어로 꿈을 꾸고 영어로 글을 쓰는 이들에게 모국어는 정체성을 증명하기 위해 뒤늦게 학습해야 하는 외국어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풍경은 한국 사회의 단면과도 겹친다. 조기 영어 교육 열풍 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세계와 소통하는 법을 배우지만 정작 자신의 뿌리가 담긴 언어의 결은 잃어간다. 자본과 기술의 언어인 영어가 사유와 감각의 언어인 모국어를 압도하는 현상은 일종의 문화적 실어증을 낳는다. 한국어의 미묘한 높낮이와 지역마다 다른 방언의 생명력이 표준화된 글로벌 규격 아래 거세되는 과정은 효율을 위해 다양성을 희생하는 자본주의의 문법과 닮아 있다. 영어 실력이 곧 계급이 되는 구조 속에서 우리 안의 요루바어는 어디쯤 표류하고 있는가.
언어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고 구성하는 틀이다. 요루바어에서 아내를 뜻하는 단어의 어원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 때 그 문화가 여성을 바라보는 복합적인 서사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듯이 언어의 소멸은 곧 한 세계의 붕괴를 의미한다. 효율을 위해 모국어의 깊이를 포기하는 대가는 결국 사유의 빈곤으로 돌아온다. 낯선 모국어를 다시 배우는 일은 단순히 단어를 외우는 과정이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저항해 나만의 주체성을 복원하는 숭고한 노동이다. 당신이 가장 깊은 잠 속에서 꿈꾸는 언어는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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