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의 늪, 소유 없는 삶의 대가
구독의 늪, 소유 없는 삶의 대가
거대 플랫폼의 결합과 소비자를 가두는 다크 패턴의 그늘
통장 잔고를 확인하다 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액 결제 내역들이 눈에 띈다. 한 달에 몇 천 원, 많게는 만 원 남짓한 돈이 매달 기계적으로 빠져나간다. 처음엔 편리함에 끌려 시작한 구독이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무엇을 구독하고 있는지조차 망각하게 된다. 과거의 경제가 물건을 팔아 이윤을 남기는 방식이었다면, 현대의 플랫폼 자본주의는 소비자를 자사 생태계에 묶어두고 정기적으로 지대를 수취하는 구독(Subscription) 경제, 즉 렌트(Rent) 경제로 변모했다. 소유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매달 반복되는 결제의 굴레와 이를 끊어내기 힘든 피로감이다.
최근 미국 미디어 시장을 뒤흔드는 워너브러더스 디스커버리(WBD) 인수전은 구독 경제의 비정한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넷플릭스와 파라마운트가 맞붙은 이번 싸움의 핵심은 결국 누가 더 많은 IP(지식재산권)를 확보해 소비자의 지갑을 장기적으로 점유하느냐에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소비자의 선택권이 오히려 축소된다는 점이다. 거대 공룡들의 결합은 필연적으로 가격 인상과 서비스 통폐합을 불러온다. 실제로 넷플릭스 구독료는 2019년 이후 38%나 올랐다. 기업들은 구독을 해지하기 어렵게 만드는 교묘한 인터페이스인 다크 패턴(Dark Patterns)을 활용해 소비자들을 가둔다. 미 연방거래위원회(FTC)가 아마존에 25억 달러의 과징금을 부과한 사례는 플랫폼 권력이 소비자 주권을 어떻게 침해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스트리밍과 인플레이션의 합성어인 스트림플레이션(Streamflation)은 이미 일상이 됐다. 유튜브, 넷플릭스 등 글로벌 플랫폼뿐만 아니라 국내 배달 앱과 쇼핑 플랫폼들도 유료 멤버십 가입을 강제하며 구독료를 인상하고 있다. 소비자들은 파편화된 콘텐츠를 즐기기 위해 다수의 서비스를 중복 구독해야 하며, 이는 가계 경제에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한다. 더 큰 문제는 플랫폼 기업들이 수익 악화의 책임을 가격 인상이라는 손쉬운 방식으로 소비자에게 전가한다는 점이다. 취약계층일수록 문화적 접근권이 구독료라는 장벽에 가로막히는 소외 현상도 심화하고 있다.
구독 경제는 기업에 안정적인 수익 모델을 제공할지 모르나, 소비자에게는 끊임없는 비용 지출과 관리의 노동을 강요한다. 클릭 한 번으로 가입은 쉽지만, 해지는 미로 찾기처럼 복잡하게 설계된 구조는 플랫폼 권력이 시민의 권리를 어떻게 유린하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이제는 구독 서비스의 투명한 운영과 손쉬운 해지권을 보장하는 디지털 권리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시급하다. 우리가 매달 지불하는 구독료는 편리함에 대한 대가인가, 아니면 거대 플랫폼이 쳐놓은 그물에 갇힌 대가인가. 소유하지 못한 채 영원히 임대료만 내야 하는 삶이 진정으로 풍요로운지 되물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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